statement
나는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또 다른 '가상의 망원경‘ 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불완전함으로 공백이 확대되어진 화면을 만들고 재조합과 재가공을 통해 만든 사물들과 인물들을 화면 안에 등장시켜 주관적인 개입을 시도한다.
가상의 망원경을 통해서 직면한 현실의 대부분은 작업실에서 그리기라는 행위를 진행하는 과정속에서 기억의 모퉁이에 박히게 되어버린 파편들만 남게 되고 그 어떠한 공간의 메타포들만이 흔적으로 남음으로써 대상의 존재를 암시하게 한다.
나의 작업은 공동체적 현실 속에서 자신의 행위 및 사고를 스스로의 것으로 조각하고 싶어했던 어떠한 개인들. 사회와의 유기적 통일체를 거부하려는 그 진행 경로 속에서 허탈한 고립감의 늪에 주저앉은 어떠한 개인들과 관련 있다.
결과적으로 시각화된 작업속의 암시적인 인물들과 풍경들은 주위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개인의 인상이 사라지거나 반대로 도드라지기도 하면서 생성되어진 또 다른 대상으로써의 잔상들이이며, 결핍의 소산물들이다.
Sangwon Kwak translates his observations of emotional conflicts and the gaps an individual feels in his or her relationship with a community into scenes. The motifs of his paintings such as a deserted building standing alone in a field, entangled weeds, and dried firewood are always present in our surroundings but we often neglect and shun them. ● Kwak at times sees situations and scenes from a distance as if observing them through a telescope while at others he examines objects in a scene as if observing them through a microscope. This change in his viewpoints signifies how he portrays a scene as part of his innerscape rather than depicting it realistically. ■ Kwak sangwon
환영(幻影)의 조건
Conditions of Illusion
조새미(미술비평)
곽상원의 그림이 지각되는 방법은 아날로그 필름 영화의 그것과 닮아있다. 다만 아날로그 필름 영화는 고정된 광원과 회전 운동에서 비롯된 비물질적 이미지의 집적으로 실현되고,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는 반면, 곽상원의 그림에는 광원은 없다. 그림 위에 그림을 겹쳐 그리는 작가의 노동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노동은 화면 안에 물리적으로 축적된다. 곽상원의 그림은 표면의 정보량을 삭감시켜 투사의 메커니즘을 자극한다. 관객에게 그림 속 수수께끼를 풀기를 독려하며, 특별한 인내를 요구한다. 작가는 그림 아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다른 그림들을 숨겼다. 화폭 속의 암호문. 관객은 보이는 그림과 보이지 않는 그림이 주고받는 암호를 해독해야 한다. 작가의 그림은 표면적으로 제공되는 시지각적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대부분의 경우 공감각적 시간의 집적으로 귀결된다.
<Contact>(2019)에서 관객의 눈에 보이는 인물은 두 명이다[Fig.1]. 그들은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Narcissus and Goldmund』(1930)의 두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하고, 긴박한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두 진영의 정치가처럼 보이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사찰의 법당 안에 그려진 탱화 속의 부처나 보살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만약 X선으로 이 그림을 촬영한다면 열 명도 넘는 인물이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 아래 그림, 시간과 사건이 쌓여져 있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이 그림에서 다른 열 명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시각적으로 지각되지 못할 그림을 의도적으로 그린 것이다.
곽상원의 <파편의 기록>연작과 같은 2017년 이전 작품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들, 정치인, 아버지와 같은 인간의 실제 모습을 화면에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한 결과였다. 이는 점차 인간의 무의식이나 성적 욕망, 불안, 절망, 죽음과 같은 인간의 심리상태 기저에 흐르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작가의 인간의 보편적 심리에 관한 관심은 환영(幻影)의 투사(projection of Illusion)라는 방법론을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지각적 분류행위와 관련하여 논의해볼 때 의미 있는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다. 로르샤흐 검사(Rorschach test)는 종이에 그려진 잉크반점이 모호한 자극으로 작용하여, 개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성격의 여러 측면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검사법으로, 자극에 의해 일어나는 지각반응을 분석하여 개인의 인격 성향을 추론하고, 불안, 긴장, 갈등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소위 환영의 투사라는 방법론을 작품 제작의 방법론으로 수용했을 때, 작품은 작가의 경험뿐 아니라 관객의 능력과도 상호작용할 수 있게 된다. 작가의 묘사는 관객의 묘사로 변용되는데, 관객은 관련 기억을 다른 기억과 새롭게 결합시켜 변주할 수 있다. 이렇듯 곽상원의 ‘그림’의 성공 여부는 관객이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기억을 투사할 의지가 있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환영을 볼 준비가 되어 있는지와 직결되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관객의 상상력이 간여할 여지를 충분히 남겨 놓았고, 이를 통해 관객은 작가가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곽상원은 관객이 판독과 해석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그림 속에 단서를 남겼다. <Blue Water>(2019)에서는 가느다란 다섯 개의 선으로, <Engraved Face>(2020)에서는 화면의 표면을 스쳐지나가는 마른 붓자국으로, <Stander>(2019-2020)[Fig.2]에서는 공기처럼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선들로, 그리고 <Treefingers>(2021)[Fig.3]에서는 생명체의 혈관처럼 표현했다. 이 일련의푸른색은 ‘없음’과 같은, 또는 대기(大氣)와 같은 상태의 메타포이다. 이 단서의 역할은 르네상스 회화에서 전형적으로 적용되었던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 발현해내는 이미지의 효력과 닮았다. 화면을 지배하는 비어 있는 상태에 관한 암시는 화면 안의 인물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화면 안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양면 그림 <Hope>(2021)와 <Air>(2021)는 천정에 설치되어 늘어뜨려져 있다[Fig.4]. <Hope>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사람의 머리처럼 보이는 형상이 보인다[Fig.5]. 시간차를 두고 다시 앞쪽으로 와 보니 앞면에는 덤불을 헤치고 나와 무엇인가 붙잡으려는 양손이 보인다. <Air> 의 뒷면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웅크리고 있는 두 사람을 그린 그림이 있다[Fig.6]. 얼굴을 맞댄 채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만물이 소생하듯 생기가 넘치는 화면의 중앙에 성별을 알 수 없는 두 존재가 있다. 하지만 캔버스의 앞면으로 돌아와 보니 뒷면에서 넘쳐나던 감정적 풍요로움이 온대 간 듯 없다. 모두 떠나버린 장소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는 혼령과 같은 실루엣만이 남아 있다. 뒷면 그림은 과거의 그림이며, 앞면 그림은 현재에 더 가깝다. 뒷면 그림은 프롤로그(prologue), 앞면 그림은 에필로그(epilogue)에 비유할 수 있다.
곽상원의 작업의 주제는 현실의 인물, 정치적 사건들에 관한 관심에서 시작하여 환영의 집적, 심리학적 분석이라는 인문학적인 관심으로 전환되어 왔다. 그의 그림들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자신들의 피부 아래 발굴되기를 기다리는 이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느냐고. 그들도 삶을 영위하고 사랑하고 싶은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 당신의 환영으로 그들을 구원해 줄 의향이 있느냐고. 울렁이는 이미지의 향연 속에 묻혀 있던 그림들은 관객의 환영이라는 통로를 통해 현실로 귀환하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보이는 그림과 보이지 않는 그림 사이를 유영하는 이들은 ‘그림’의 존재 이유는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자신들을 통해서만 예술이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물질, 공간, 시간과 같은 물리적 요소가 그림 안에서 여전히 뿌리 깊이 존재하는 조건 하에서도 환영이 없다면 그림도 없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이명(耳鳴)을 일으킨다.
‘선(curve) : 결정의 리듬을 즐기기’
조숙현(미술비평)
곽상원 작가의 작업은 선(curve)들의 향유이다. 작업에는 이리저리 자유롭게 구부러진 선들이 다양한 색채로 떠다닌다. 선은 다양한 이미지 역할을 수행한다. 하키 선수의 외로운 그림자로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가, 숲속의 밤을 뒤덮는 알 수 없는 공포가 되고, 활활 타오르는 잿빛 불이 되었다가, 밤바다의 파도가 되고, 작가의 어제의 외로움과 오늘의 결기를 엿보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곽상원 작가의 선이 매력적인 이유는, 캔버스의 다층적인 레이어 이면에 리듬과 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캔버스의 자유로운 선들은 구상과 추상의 이미지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감정선의 역할도 행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우리에게 컨택(contact)의 순간은 중요하다. 동서남북의 커브가 작가의 매일의 심리를 담은 감정선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작가의 작업에는 구상적인 형태가 있는 작업과 추상적인 개념을 담은 이미지가 교차한다. 그림의 내용으로 구분될 수 있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바다, 숲 등 자연을 담은 풍경 작업은 단순히 풍경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머리와 마음에 남아 있는 풍경의 이모저모가 곡선의 표현을 통해 표출된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풍경의 실재는 곽상원 작가의 작업을 해석함에 있어 그렇게 중요한 화두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가 동양화 전공이라는 점과도 관련 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동양화에서는 작가가 전지적 시점의 주인공이 되어 작업을 탐험하고 완성한다. 작가는 주어진 현실이나 이미지를 그대로 모사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작가가 ‘선’에 대해 집중하게 된 계기는 작가로서 원초적인 작업 활동과 관련 깊다. 선은 그림의 구성요소뿐만 아니라 자체로서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또한 곽상원의 선이 그려내고 있는 것은 실재가 아닌 관념의 미메시스이기도 하다. 작가는 꿈, 공상, 실재에 더해진 상상 등 몽환적인 이미지들을 그려낸다. 또한 이 선들은 매우 즉흥적이다. 심지어 스케치(밑그림)를 하지 않고 회화 붓질로 마구 노닐다가 완성되는 그림들도 있다. 특정 형식이나 서사를 정해놓지 않고 캔버스(화면) 안에서 완성된 선들은 결정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다.
즉흥성에 대해서는 잠시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작가는 평소 시각예술가의 독특하고 예민한 미감으로 포착한 ‘일상의 풍경’을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화폭에 풀어낸다. 예를 들어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지나쳤던 밤거리, 일상을 걸어가며 포착했던 주변의 풍경, 그리고 매일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미묘한 차이를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가 펼쳐낸다. 매일의 풍경은 조금씩 다르고, 그것을 접하고 풀어내는 작가의 마음도 매일 다르다. 이렇게 완성된 솔직한 감정의 회화는 여러 겹의 레이어가 겹쳐지며 풍부한 서사와 미스터리를 완성한다. 원초적인 회화의 에너지와 그것을 정제하고 때로 폭발시키는 힘이 겹치고, 인물화와 풍경화가 겹친다. 작가의 작업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지만, 그것은 때로 온몸으로 하나의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회화 속 선들의 장막을 거둬내고 나면 그 뒤에 생명이 숨어있을 것 같은 기운을 온몸으로 풍기고 있다.
뭉크, 바실리크, 피터 도히그, 키키 스미스 등은 곽상원이 이미지를 그려나가는 방식에서 힘이 되는 작가들이다. 또한 추후 이미지의 대상에 대해 끈덕지게 추격하고 싶은 작가들이기도 하다. 계산적인 선의 이미지가 아니라 의식의 흐름으로 완성되는, 어느 날은 잘 되고 어느 날은 잘 안 되는, 언제나 조금씩 다른 마음으로 수행하는 선들의 향연.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런 선들을 좀 더 끝까지 밀어붙이고 부각시키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풍경화 안에 숨어 있는 인물은 작가가 그리고 싶은 이미지의 덩어리에서 기능한다. 구체적인 형태나 이름을 갖지 않은 익명의 존재로 남아 모호함의 바다에서 리듬을 즐기는 것. 그것이 곽상원 작가가 리듬의 이미지를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우연과 필연 사이, 무수한 삶의 파편들로부터
김 현(아트스페이스 휴 큐레이터)
짧은 시간 그는 나무 그늘에 서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가져갈 것인가. 오늘의 기억으로 남겨 둘 것인가. 하던 차에 어디선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 새는 무심히 소나무 위를 비행하다 적당히 자신이 한 숨 돌리기에 타당해 보이는 가지에 앉았다. 새는 성인이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는지 그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 또한 흔히 말하는 그림속의 한 장면스러웠는데 K가 머릿속에 구상은 했지만 도통 분위기 자체가 떠오르지 않아 망설였던 캔버스의 화면 구도 같았다. (작가 수필 「새와 깃발」 중 일부)
#새와 깃발
곽상원의 최근 목탄 드로잉 작업은 순서가 뒤섞인 영화 필름처럼 비연속적으로 연결되어있다. 내용은 더 단순하고 명확해졌으며 표현은 더 거칠고 과감해졌다. 장르로 보자면, 잔혹한 느와르 영화에 가깝다. 각각의 장면들은 시간과 공간을 교차하며 단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작가의 수필은 이러한 이야기 사이의 빈 공간을 연결하며 작품을 독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등장인물 K는 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깃발을 가지고 내려올지 말지를 고민하고, 그 사이 새는 그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다. 결국 K는 깃발을 가지고 내려오기로 결정하지만 산을 다 내려왔을 무렵, 깃대에 꽂힌 깃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빈 깃대만 남았음을 알게 된다. 짧은 수필의 한 장면은 사소한 일에 고민하고 망설이는 K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새의 단순하고 명쾌한 움직임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는 그의 작업에서 복잡하고 거친 필치, 시점의 이동과 변화 등으로 나타난다. ‘무엇인가가 합당한 이유로 있었다. 라기보다는 다가오기에 담아 둔 것 뿐 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연과 필연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일상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흩어져있다.
#불안
집단이나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독과 불안의 정서는 곽상원 작업의 중요한 키워드로 오랜 시간 그를 수식했다. 곽상원의 초기 작업은 특정 집단에 속해있는 군집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군대 시리즈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젊음과 힘을 과시하는 군인들의 과장된 제스처를 작가 특유의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묘사한 작업은 도발적인 에너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텅 비어있는 인상을 주었다. 아마도 그것은 집단이 발휘하는 공허한 힘 뒤에 감춰진 개인의 불안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냉소적인 시선이 때문일 것이다. 이후 그의 작업은 특정한 집단이나 인물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풍경 자체를 전면에 드러내거나 인물을 풍경의 일부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배회, 배회자로 명명되는 작업들이 이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적 색채와 절제된 표현,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한 표면 등 곽상원 특유의 음울한 풍경이 완성된다.
#불, 물, 숲
곽상원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물이나 불, 숲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환경에 서서히 침잠되어 간다. 마땅히 거부하지도 완전히 동화되지도 않은 상태로 얼굴이 없는 신체는 화면을 부유한다.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은 물체가 아닌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보고 그 물질을 물, 불, 공기, 흙의 4가지 원소로 분류하였다. 이 4가지 원소는 죽음, 소멸, 생성, 생명과 같은 포괄적인 의미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는데 예를 들어 불은 소멸과 죽음의 이미지에 가깝지만 불꽃이 수직으로 타오르는 모습은 하늘을 향한 비상, 생명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시학과 단편들』) 불의 상승하는 이미지는 곽상원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인데, 그는 이전 작업 <불이 되어버린 사람>, <영원히 타오르는 재>에서 집단이나 사회의 외압을 불의 이미지로 시각화했다. 또한 주변에 동화되지 않고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의 모습은 하늘로 상승하는 불의 특성과 우연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물은 불보다 여성적인 물질이면서 ‘물은 항상 흐르며, 물은 항상 떨어지며, 그리고 항상 수평적인 죽음으로 끝난다.’(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불과 마찬가지로 물과 숲의 이미지는 인간의 욕구나 의지를 억압하거나 붙잡아두려는 반대적 힘의 작용으로 읽힌다. 불과 숲이 수직으로 뻗은 상승하는 힘이라면, 물은 수평으로 흐르는 정적인 힘이다. 인물들은 숨 막히도록 빽빽하게 메워진 숲 안에서 혹은 주변을 맴도는 물 안에 갇혀 그 존재의 의무를 증명해내려 끊임없이 애쓴다.
바위 틈 사이에 겨우 피어난 풀 같이 존재의 미약함을 나타낸 이전 작업과 달리 근작에서는 인물의 밀도와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주목할 만 한 점은 두 명의 인물이나 사물이 한 화면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고독이나 불안에 갇혀있던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 관계를 통해 문제를 인식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익명화된 신체는 자신과 구분되는 타자이거나 하나의 자아에서 분열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는데 양쪽의 관점 모두 갈등의 대상이 외부로 향해있던 이전 작업과 달리 자신 내부에서 답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다. <이동하며 깨져 나가는 동물 조각>, <무던한 새>의 몸을 덮고 있는 얇은 시멘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깨지고 부서져 전시장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된다. 작가의 의도대로라면 이 조각들은 전시가 끝날 무렵에는 완전히 파편화되어 본래의 형체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견고하고 단단한 것으로 몸을 무장하고 지켜낼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일까. 어쩌면 겹겹이 쌓인 감정의 찌꺼기들도 일순간에 흩어지고 사라져버릴 무수한 삶의 파편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불안의 내용
황석권 / 월간미술 수석기자
누구나 자신의 삶이 안정적이길 바란다. 말 못하는 어린아이부터 당장 오늘내일하는 고령의 어른 할 것 없이 말이다. 그런데 스트레스 없이 긴장하지 않은 심적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이는 있어도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이는 없다. 그래서 불안은 매우 일상적이다. 본인의 의지로서 불안을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숙명처럼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많은 관계와 업무로 짜여 있기에 불안은 지속적인 형태의 것이 아니라 간간이 엄습해 온다.
곽상원의 작업의 근간은 불안이다. 그리고 그가 느끼는 불안감은 고립이라는 상황으로 풀어서 제시된다. 그는 불안을 느끼는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기보다 캔버스를 지배하는 음울한 분위기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우선 그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이룩된다. 그런데 그가 기억의 저장소에 꺼낸 그 풍경은 상황은 매우 일상적이며 익숙한 것인데 분명히 현실과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곽상원은 일상에서 익숙한 풍경에서 낯선 불안감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하게 한다. 그 양립할 수 없는 공존이 가능한 이유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곽상원이 그려내는 대상은 치밀한 관찰의 결과로 이뤄진 것이 아닌 망막의 신경에 스쳐 지나간 대상처럼 보인다. 특정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정도의 흐릿한 기억을 확인한다. 따라서 곽상원의 작업은 ‘배회’라는 행위를 증거하고 있다. 작가가 현장을 찾았다는 사실은 확인되지만 무슨 이유로 그곳을 찾았는지 어떤 ‘목적’은 배제된다. 따라서 곽상원의 캔버스는 ‘황량함’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어떤 것도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 사랑, 감정, 지위, 사람과의 관계도 어쩌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작가의 말) 곽상원의 행위 중 캔버스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 유일한 목적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대상화하는 것에서 작가는 불안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려 한다.
곽상원의 캔버스를 보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 얼마 전 타계한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먼(Zygmunt Bauman)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바우먼은 『유동하는 공포 Liquid Fear』를 통해 자신의 삶의 재단자인 인간 스스로가 느끼는 불안에 대하여 “유동한다(liquid)”로 표현했다. 신에게서 빼앗은 삶의 주도권은 시대가 변하면서 오히려 불안이 극대화되는 유동성을 띄게 됐다는 바, 우리의 삶은 확고함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닌 불안함으로 채워진다는 말이다. 매일 치열함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지만 오히려 앞을 알 수 없는 불안은 더 극대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곽상원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배회’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말이다. “퇴색해버린 하나의 순간과 앙금의 기억으로 남은 화면 속의 색과 장면들의 파편들처럼 표현했다.”
머물 곳을 잃어버린 이들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다양한 기억을 축적한다. 그러면서 체념을 배운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는 관계의 허무함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내용은 매우 일반적인 것으로 자신이 하는 일, 사랑, 사회적 지위 등을 지시한다. 대부분 우리의 번뇌는 이것들을 어떻게 지속하느냐로부터 생성된다. 지금의 상태와 관계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우리는 그것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불안은 영속하려는 가치가 주는 효용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의 부재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일상에서 끊임없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게 되어 허무함은 더 증대된다.
곽상원의 불안의 내용은 특정한 세대에 국한하지 않는다. 자연인으로서 그의 세대가 느끼는 불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문득 특별한 계기가 바탕이 되지 않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불안이 감지된다. 작가는 이에 대해 “나이를 초월한 내면의 고민과 불안은 누구에게나 그 형태는 다르지만 존재한다. 그 심리적 층위가 바로 내 작업이다.”라고 답한다. 그래서 곽상원 작업의 내용을 내면의 어두운 감정들과 욕망에 관한 다양한 서사로,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인 구성은 파편적인 내러티브로 짜여 있다고 본다.
좀처럼 떨치기 힘든 이러한 심리상태는 작가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운명처럼 품는 고민이기에 존재라는 거창한 말로 포장된 바로 우리의 고립감으로 드러난다. 이런 상태는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를 갖는데 그래서 곽상원은 이를 선과 안료를 이용하여 “쌓아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내용은 보이는 것들에 대한 주밍(zooming)으로 원경과 극단의 근경, 혹은 어떤 대상인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부분을 과대하게 확대한 것들이다. 이러한 시점의 변화도 하루하루 변화를 겪는 심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전시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독립적인 하나의 캔버스가 전시장의 상황과 결부되면서 관객의 등장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벽면의 패턴, 조명의 조도, 관객의 동선 심지어 전시장 공기의 흐름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배회’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불안은 그것을 상쇄할 어떤 심적 대응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의 성공 여부에 목적하기보다 본능적으로 불안은 떨쳐야 하는 것, 삶에 부정적인 것 등으로 인식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어쩌랴. 불안은 불치의 병처럼 안고 가야 하는 것, 친구처럼 지내야 하는 것인데. 상쇄보다는 존재를 인정하는 편이 더 현명한 대응일지도 모르겠다. 곽상원은 바로 그런 선택을 한 모양이다.
억압, 공동체, 익명, 그리고 이미지 - 곽상원의 회화에 대한 글
이성휘 / 하이트문화재단 큐레이터
곽상원의 2014년 작 <표류된 조우>로 시작해보자. 이 그림은 청회색 구름이 덮인 하늘 바로 아래로 세 개의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는 어둑한 산비탈이 원경으로 보이고, 그 앞에 펼쳐진 벌판에는 가건물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으며, 마치 온갖 서식물들이 뒤엉켜 있는 듯한 습지가 전경에 펼쳐져 있는 그림이다. 그림이 묘사한 풍경은 음산한 분위기를 빼곤 아주 낯선 풍경은 아니다. 다만 하나씩 뜯어볼수록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된다. 화면을 덮은 창백한 푸른색은 경관을 생기라곤 하나 없는 곳으로 만들고, 적막한 가운데 어떤 음모나 범죄가 가능한 곳을 상상케 한다. 특히 전경의 습지를 묘사함에 있어서 작가는 뒤엉킨 붓질 위로 마치 물이 흘러내리듯 물감이 줄줄 흘러내리게 했다. 이 묘사가 이 그림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데, 화면 상단의 산비탈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그 자체가 묘사된 이미지로 볼 수 있으나, 화면 하단에 와서는 이미지에 불과했던 물줄기가 캔버스 위로 줄줄 흘러내림으로써 물리적 물줄기로 전환되었다. 물감의 흘러내림은 중경의 수풀이 아니라 정확히 전경의 습지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물과 물감을 동일시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여기에 그림의 음산한 분위기가 더해져 물감은 어떤 범죄 현장의 혈흔과 같은 더 잔혹한 흔적까지 연상시킨다. 그리하여 작품을 대면하는 관람자는 이미지만이 아니라 물리적 흔적으로써 작품과 조우하는 셈인데,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비릿하고 불편한 감정을 어쩌지 못하게 된다.
곽상원의 회화는 개인과 공동체 간의 억압의 문제,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익명의 존재로 있을 때 개인의 이중성에 대한 문제를 다뤄왔다. 집단 구성원으로서 개인은 공동체의 목적에 부합하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속박당하고, 공동체는 이를 당연시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 군대, 직장 등 우리 사회의 여러 집단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이러한 개인과 공동체 간의 억압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대한민국 내의 여러 집단에 속하면서 살아온 작가 자신도 이러한 문제들을 겪었을 터, 어쩌면 <표류된 조우>는 작가가 군대 시절에 경험한 사건의 한 광경일 수도 있다. 그러나 회화를 반드시 구체적인 사건의 서사로 국한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이 그림은 좀 더 모호한 암시로 남는다.
최근 곽상원은 '누아르(noir)'라는 키워드로 일련의 작업을 전개해 왔다. 작가는 누아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음산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자신의 회화로 끌어들이는데, 그에 의하면, 누아르 영화가 다루는 비정한 범죄나 폭력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의 일면인 만큼 이미지로서도 도처에 만연해 있다. 그는 폭력성이 잠재된 이미지를 자신의 회화의 소재로 다룸으로써 오늘날의 리얼리즘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SNS상에서 무방비로 흩어져 있는 범죄나 폭력의 뉘앙스를 띈 이미지들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이러한 이미지들은 익명에 가까운 개인들이 업로드하여 공유된 것들이다. 작가는 익명의 개인들이 SNS상에 공유하는 이미지들 중에는 폭력과 범죄, 성적 코드가 센 이미지들이 많은데, 이 이미지들이 수많은 개인들에 의해 다시 리트윗됨으로써 이미지들이 지닌 폭력성이나 성적 코드가 증폭된다고 본다. 여기서 작가는 익명의 개인이 인터넷상에서 취하는 이중성을 목격한다. 그는 개인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피할 수 없는 공동체 생활, 그리고 이 속에서 느끼게 되는 좌절, 압박, 소외, 그 아이러니한 고독 가운데서 꿈꾸게 되는 일탈의 일부가 인터넷에 업로드된 폭력적인 이미지에 반영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이 이중성을 띄고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 오늘날의 리얼리즘이라고 한다. 거의 흑백으로 그린 그의 '누아르' 시리즈는 참조한 사진들의 프레이밍이나 각도, 조명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손, 발, 허벅지 등 신체의 일부를 클로즈업하여 전체 상황에 대한 궁금함을 자아내는데, 화면에 담긴 신체의 일부나 포즈가 구체적인 정보, 폭력적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암시의 측면이 더 강하다. 회화에 구체적인 서사를 담지 않고 모호한 상태로, 상상의 여지를 두는 것은 그가 전부터 취해 온 방식이다. 이것이 익명의 개인들이 이미지를 리트윗하여 폭력성이나 성적 코드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만약 곽상원의 회화가 사회 현상을 그대로 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리고 이를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그림은 또 다른 리트윗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터넷에 만연되어 있는 무수한 사진들이 우리를 폭력적이고 성적인 이미지에 무뎌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면, 그의 회화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불온함을 화면 밖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던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이미 그는 <표류된 조우>에서 이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회화가 이미지이자 물질인 이유. 그리하여 관람자는 온몸으로 그 물질이 던지는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펙터클의 균열을 확대하는 표류자의 시선 - 곽상원의 회화에 대한 글
이선영 비평가
● 곽상원은 존재와 그것이 놓이는 맥락 간의 모순을 표현한다. 작품들은 낯선 곳에 던져진 실존적 존재/상황에 대한 비유들을 담고 있다. ● 추상적인 큰 공간에 놓인 작은 생명이라는 설정은, 동양화나 낭만주의 풍경화만큼이나 현대 도시와 그 속에 거주하는 인간이라는 비유로 다가온다. 정처 없이 배회하는 인간의 시선이 머무는 장소는 자연 그자체도 본격적인 도심도 아니다. 말하자면 곧 중심이 되어 번영을 구가할 것이라 기대되는 주변부이다. 중심을 불완전하게 복제하는 주변은 중심을 바라보며 무한정한 대기나 유예의 상태에 있다. 그곳의 집들은 정주도 유목도 아닌 어정쩡한 유보의 상태이며, 사람들은 그곳에 완전히 뿌리내지 않는다. 잠시 머무르거나 스쳐지나갈 뿐이다. 성장이라는 목표는 이러한 과도기적인 시공간 또한 양산해 냈다. 이러한 장소들은 작가만이 발견할 수 있는 특별히 예외적인 장소가 아니라 도처에 있다. 명확한 시공간을 지우는 그의 방식은 이러한 보편성의 확보에 도움을 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토포스(Topos)로서의 특징이 있다.
배회라는 방식은 작품제작에도 적용되어, 그의 작품은 정확한 스케치가 없이 계속 바뀐다. 그러나 붓터치나 분위기는 일정하여, 여러 뜬금없는 장소들과 사물들과 상황들이 나름의 연결망을 이룬다. 그것은 특정한 현실이라기보다는 기억이나 상상, 어떤 정조에 의해 감축, 강화된 장면이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친숙한 곽상원의 풍경은 그가 작품 소재를 멀리서 찾지 않는 다는 점과 관련된다. 그의 작업실이 있는 신도시에서 풍경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구도심과 달리, 널찍널찍하게 뚫려있는 길은 인도라기보다는 자동차 도로이며, 머물기 보다는 통과하기 위한 장소이고, 접촉하고 대화하기 보다는 투명 인간처럼 서로를 스쳐 지나며, 서로가 아닌 각자 다른 무엇과 소통하는 그런 장소 말이다.
신도시에 전형적인 그러한 장소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 곳곳에 정체된 곳을 담겨두어 황량함에 황폐함까지 가세하곤 한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도시와 달리, 철저하게 현대의 생산/소비 시스템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조화된 그런 새로운 종류의 도시에서, 자발적 타발적으로 어디에도 속하기 힘든 자의 시선은 쓸쓸할 수밖에 없다. 그 체계가 강압적으로 또는 유혹적으로 재현하는 거대한 주기 속에 합류하지 않으면 그는 투명 인간이나 유령이 되는데, 이는 '자유직업'군에 속하는 현대의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시선이다.
그의 작품은 극단적인 분리와 구획화 안팎에 있는 풍경에 내재한 위태로운 신호를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임시 가옥들은 코드화의 극단에 코드의 붕괴가 임박함을 알려준다. 구조 자체에 해체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리드 구조와 대조되는 덩굴의 방식은 초월적 중심이 아니라, 다양한 중심들의 교차를 알려준다. 획일적 도시계획에 대한 대안적인 비전처럼, 작가는 집중적인 계획보다는 자생적인 그물망을 강조하면서 차이 짓기를 가속화한다. 그는 체계 바깥의 것들을 주시한다. 체계가 내면화하지 못했던 망각된 존재들, 즉 지배적인 규칙에 포섭될 수 없었던 타자들의 존재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에게 바깥과 타자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인간으로부터 소원한 세계라는 상황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것은 생산자가 생산수단이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것에서 비롯된다. 소외를 극복하는 방식은 각자의 정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 곽상원의 방식은 상황주의자들의 그것과 가깝다. 피터 마샬이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에서 지적하듯이, 상황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화석화된 삶을 대신해서 행위들과 우연한 만남의 흐름인 표류와 사건들과 이미지들을 재배치하는 전용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표류의 전략은 혁명보다는 '풍요의 사회'에 더 적절한 대응방식으로 보인다. 표류의 전략은 사회에 대한 거대한 정치적 목표보다는, 일상 속에서의 변형과 창조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은 일사 분란한 의견과 행동의 통일이라는 전략을 추구하는 방식보다는 이러한 무정부주의적 방식과 더 어울린다. 우리가 사는 곳을 바라보는 곽상원의 낯선 시각은 '스펙터클의 사회'(기 드보르)를 비판하면서, 상품으로 매개되지 않는 현실을 추구하는 방식과 조응한다. 그의 시선은 '기존질서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행하는 자신에 관한 담론인 스펙터클'(기 드보르)에 균열을 내고, 그 균열 안에서 번성할 대화를 청하기 때문이다. ■
나는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또 다른 '가상의 망원경‘ 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불완전함으로 공백이 확대되어진 화면을 만들고 재조합과 재가공을 통해 만든 사물들과 인물들을 화면 안에 등장시켜 주관적인 개입을 시도한다.
가상의 망원경을 통해서 직면한 현실의 대부분은 작업실에서 그리기라는 행위를 진행하는 과정속에서 기억의 모퉁이에 박히게 되어버린 파편들만 남게 되고 그 어떠한 공간의 메타포들만이 흔적으로 남음으로써 대상의 존재를 암시하게 한다.
나의 작업은 공동체적 현실 속에서 자신의 행위 및 사고를 스스로의 것으로 조각하고 싶어했던 어떠한 개인들. 사회와의 유기적 통일체를 거부하려는 그 진행 경로 속에서 허탈한 고립감의 늪에 주저앉은 어떠한 개인들과 관련 있다.
결과적으로 시각화된 작업속의 암시적인 인물들과 풍경들은 주위의 상황과 맞물리면서 개인의 인상이 사라지거나 반대로 도드라지기도 하면서 생성되어진 또 다른 대상으로써의 잔상들이이며, 결핍의 소산물들이다.
Sangwon Kwak translates his observations of emotional conflicts and the gaps an individual feels in his or her relationship with a community into scenes. The motifs of his paintings such as a deserted building standing alone in a field, entangled weeds, and dried firewood are always present in our surroundings but we often neglect and shun them. ● Kwak at times sees situations and scenes from a distance as if observing them through a telescope while at others he examines objects in a scene as if observing them through a microscope. This change in his viewpoints signifies how he portrays a scene as part of his innerscape rather than depicting it realistically. ■ Kwak sangwon
환영(幻影)의 조건
Conditions of Illusion
조새미(미술비평)
곽상원의 그림이 지각되는 방법은 아날로그 필름 영화의 그것과 닮아있다. 다만 아날로그 필름 영화는 고정된 광원과 회전 운동에서 비롯된 비물질적 이미지의 집적으로 실현되고,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는 반면, 곽상원의 그림에는 광원은 없다. 그림 위에 그림을 겹쳐 그리는 작가의 노동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노동은 화면 안에 물리적으로 축적된다. 곽상원의 그림은 표면의 정보량을 삭감시켜 투사의 메커니즘을 자극한다. 관객에게 그림 속 수수께끼를 풀기를 독려하며, 특별한 인내를 요구한다. 작가는 그림 아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다른 그림들을 숨겼다. 화폭 속의 암호문. 관객은 보이는 그림과 보이지 않는 그림이 주고받는 암호를 해독해야 한다. 작가의 그림은 표면적으로 제공되는 시지각적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대부분의 경우 공감각적 시간의 집적으로 귀결된다.
<Contact>(2019)에서 관객의 눈에 보이는 인물은 두 명이다[Fig.1]. 그들은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Narcissus and Goldmund』(1930)의 두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하고, 긴박한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두 진영의 정치가처럼 보이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사찰의 법당 안에 그려진 탱화 속의 부처나 보살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만약 X선으로 이 그림을 촬영한다면 열 명도 넘는 인물이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 아래 그림, 시간과 사건이 쌓여져 있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이 그림에서 다른 열 명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시각적으로 지각되지 못할 그림을 의도적으로 그린 것이다.
곽상원의 <파편의 기록>연작과 같은 2017년 이전 작품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들, 정치인, 아버지와 같은 인간의 실제 모습을 화면에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한 결과였다. 이는 점차 인간의 무의식이나 성적 욕망, 불안, 절망, 죽음과 같은 인간의 심리상태 기저에 흐르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작가의 인간의 보편적 심리에 관한 관심은 환영(幻影)의 투사(projection of Illusion)라는 방법론을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지각적 분류행위와 관련하여 논의해볼 때 의미 있는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다. 로르샤흐 검사(Rorschach test)는 종이에 그려진 잉크반점이 모호한 자극으로 작용하여, 개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성격의 여러 측면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검사법으로, 자극에 의해 일어나는 지각반응을 분석하여 개인의 인격 성향을 추론하고, 불안, 긴장, 갈등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소위 환영의 투사라는 방법론을 작품 제작의 방법론으로 수용했을 때, 작품은 작가의 경험뿐 아니라 관객의 능력과도 상호작용할 수 있게 된다. 작가의 묘사는 관객의 묘사로 변용되는데, 관객은 관련 기억을 다른 기억과 새롭게 결합시켜 변주할 수 있다. 이렇듯 곽상원의 ‘그림’의 성공 여부는 관객이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기억을 투사할 의지가 있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환영을 볼 준비가 되어 있는지와 직결되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관객의 상상력이 간여할 여지를 충분히 남겨 놓았고, 이를 통해 관객은 작가가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곽상원은 관객이 판독과 해석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그림 속에 단서를 남겼다. <Blue Water>(2019)에서는 가느다란 다섯 개의 선으로, <Engraved Face>(2020)에서는 화면의 표면을 스쳐지나가는 마른 붓자국으로, <Stander>(2019-2020)[Fig.2]에서는 공기처럼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선들로, 그리고 <Treefingers>(2021)[Fig.3]에서는 생명체의 혈관처럼 표현했다. 이 일련의푸른색은 ‘없음’과 같은, 또는 대기(大氣)와 같은 상태의 메타포이다. 이 단서의 역할은 르네상스 회화에서 전형적으로 적용되었던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 발현해내는 이미지의 효력과 닮았다. 화면을 지배하는 비어 있는 상태에 관한 암시는 화면 안의 인물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화면 안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양면 그림 <Hope>(2021)와 <Air>(2021)는 천정에 설치되어 늘어뜨려져 있다[Fig.4]. <Hope>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사람의 머리처럼 보이는 형상이 보인다[Fig.5]. 시간차를 두고 다시 앞쪽으로 와 보니 앞면에는 덤불을 헤치고 나와 무엇인가 붙잡으려는 양손이 보인다. <Air> 의 뒷면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웅크리고 있는 두 사람을 그린 그림이 있다[Fig.6]. 얼굴을 맞댄 채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만물이 소생하듯 생기가 넘치는 화면의 중앙에 성별을 알 수 없는 두 존재가 있다. 하지만 캔버스의 앞면으로 돌아와 보니 뒷면에서 넘쳐나던 감정적 풍요로움이 온대 간 듯 없다. 모두 떠나버린 장소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는 혼령과 같은 실루엣만이 남아 있다. 뒷면 그림은 과거의 그림이며, 앞면 그림은 현재에 더 가깝다. 뒷면 그림은 프롤로그(prologue), 앞면 그림은 에필로그(epilogue)에 비유할 수 있다.
곽상원의 작업의 주제는 현실의 인물, 정치적 사건들에 관한 관심에서 시작하여 환영의 집적, 심리학적 분석이라는 인문학적인 관심으로 전환되어 왔다. 그의 그림들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자신들의 피부 아래 발굴되기를 기다리는 이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느냐고. 그들도 삶을 영위하고 사랑하고 싶은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 당신의 환영으로 그들을 구원해 줄 의향이 있느냐고. 울렁이는 이미지의 향연 속에 묻혀 있던 그림들은 관객의 환영이라는 통로를 통해 현실로 귀환하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보이는 그림과 보이지 않는 그림 사이를 유영하는 이들은 ‘그림’의 존재 이유는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자신들을 통해서만 예술이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물질, 공간, 시간과 같은 물리적 요소가 그림 안에서 여전히 뿌리 깊이 존재하는 조건 하에서도 환영이 없다면 그림도 없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이명(耳鳴)을 일으킨다.
‘선(curve) : 결정의 리듬을 즐기기’
조숙현(미술비평)
곽상원 작가의 작업은 선(curve)들의 향유이다. 작업에는 이리저리 자유롭게 구부러진 선들이 다양한 색채로 떠다닌다. 선은 다양한 이미지 역할을 수행한다. 하키 선수의 외로운 그림자로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가, 숲속의 밤을 뒤덮는 알 수 없는 공포가 되고, 활활 타오르는 잿빛 불이 되었다가, 밤바다의 파도가 되고, 작가의 어제의 외로움과 오늘의 결기를 엿보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곽상원 작가의 선이 매력적인 이유는, 캔버스의 다층적인 레이어 이면에 리듬과 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캔버스의 자유로운 선들은 구상과 추상의 이미지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감정선의 역할도 행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우리에게 컨택(contact)의 순간은 중요하다. 동서남북의 커브가 작가의 매일의 심리를 담은 감정선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작가의 작업에는 구상적인 형태가 있는 작업과 추상적인 개념을 담은 이미지가 교차한다. 그림의 내용으로 구분될 수 있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바다, 숲 등 자연을 담은 풍경 작업은 단순히 풍경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머리와 마음에 남아 있는 풍경의 이모저모가 곡선의 표현을 통해 표출된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풍경의 실재는 곽상원 작가의 작업을 해석함에 있어 그렇게 중요한 화두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가 동양화 전공이라는 점과도 관련 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동양화에서는 작가가 전지적 시점의 주인공이 되어 작업을 탐험하고 완성한다. 작가는 주어진 현실이나 이미지를 그대로 모사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작가가 ‘선’에 대해 집중하게 된 계기는 작가로서 원초적인 작업 활동과 관련 깊다. 선은 그림의 구성요소뿐만 아니라 자체로서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또한 곽상원의 선이 그려내고 있는 것은 실재가 아닌 관념의 미메시스이기도 하다. 작가는 꿈, 공상, 실재에 더해진 상상 등 몽환적인 이미지들을 그려낸다. 또한 이 선들은 매우 즉흥적이다. 심지어 스케치(밑그림)를 하지 않고 회화 붓질로 마구 노닐다가 완성되는 그림들도 있다. 특정 형식이나 서사를 정해놓지 않고 캔버스(화면) 안에서 완성된 선들은 결정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다.
즉흥성에 대해서는 잠시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작가는 평소 시각예술가의 독특하고 예민한 미감으로 포착한 ‘일상의 풍경’을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화폭에 풀어낸다. 예를 들어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지나쳤던 밤거리, 일상을 걸어가며 포착했던 주변의 풍경, 그리고 매일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미묘한 차이를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가 펼쳐낸다. 매일의 풍경은 조금씩 다르고, 그것을 접하고 풀어내는 작가의 마음도 매일 다르다. 이렇게 완성된 솔직한 감정의 회화는 여러 겹의 레이어가 겹쳐지며 풍부한 서사와 미스터리를 완성한다. 원초적인 회화의 에너지와 그것을 정제하고 때로 폭발시키는 힘이 겹치고, 인물화와 풍경화가 겹친다. 작가의 작업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지만, 그것은 때로 온몸으로 하나의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회화 속 선들의 장막을 거둬내고 나면 그 뒤에 생명이 숨어있을 것 같은 기운을 온몸으로 풍기고 있다.
뭉크, 바실리크, 피터 도히그, 키키 스미스 등은 곽상원이 이미지를 그려나가는 방식에서 힘이 되는 작가들이다. 또한 추후 이미지의 대상에 대해 끈덕지게 추격하고 싶은 작가들이기도 하다. 계산적인 선의 이미지가 아니라 의식의 흐름으로 완성되는, 어느 날은 잘 되고 어느 날은 잘 안 되는, 언제나 조금씩 다른 마음으로 수행하는 선들의 향연.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런 선들을 좀 더 끝까지 밀어붙이고 부각시키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풍경화 안에 숨어 있는 인물은 작가가 그리고 싶은 이미지의 덩어리에서 기능한다. 구체적인 형태나 이름을 갖지 않은 익명의 존재로 남아 모호함의 바다에서 리듬을 즐기는 것. 그것이 곽상원 작가가 리듬의 이미지를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우연과 필연 사이, 무수한 삶의 파편들로부터
김 현(아트스페이스 휴 큐레이터)
짧은 시간 그는 나무 그늘에 서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가져갈 것인가. 오늘의 기억으로 남겨 둘 것인가. 하던 차에 어디선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 새는 무심히 소나무 위를 비행하다 적당히 자신이 한 숨 돌리기에 타당해 보이는 가지에 앉았다. 새는 성인이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는지 그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 또한 흔히 말하는 그림속의 한 장면스러웠는데 K가 머릿속에 구상은 했지만 도통 분위기 자체가 떠오르지 않아 망설였던 캔버스의 화면 구도 같았다. (작가 수필 「새와 깃발」 중 일부)
#새와 깃발
곽상원의 최근 목탄 드로잉 작업은 순서가 뒤섞인 영화 필름처럼 비연속적으로 연결되어있다. 내용은 더 단순하고 명확해졌으며 표현은 더 거칠고 과감해졌다. 장르로 보자면, 잔혹한 느와르 영화에 가깝다. 각각의 장면들은 시간과 공간을 교차하며 단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작가의 수필은 이러한 이야기 사이의 빈 공간을 연결하며 작품을 독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등장인물 K는 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깃발을 가지고 내려올지 말지를 고민하고, 그 사이 새는 그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다. 결국 K는 깃발을 가지고 내려오기로 결정하지만 산을 다 내려왔을 무렵, 깃대에 꽂힌 깃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빈 깃대만 남았음을 알게 된다. 짧은 수필의 한 장면은 사소한 일에 고민하고 망설이는 K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새의 단순하고 명쾌한 움직임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는 그의 작업에서 복잡하고 거친 필치, 시점의 이동과 변화 등으로 나타난다. ‘무엇인가가 합당한 이유로 있었다. 라기보다는 다가오기에 담아 둔 것 뿐 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연과 필연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일상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흩어져있다.
#불안
집단이나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독과 불안의 정서는 곽상원 작업의 중요한 키워드로 오랜 시간 그를 수식했다. 곽상원의 초기 작업은 특정 집단에 속해있는 군집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군대 시리즈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젊음과 힘을 과시하는 군인들의 과장된 제스처를 작가 특유의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묘사한 작업은 도발적인 에너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텅 비어있는 인상을 주었다. 아마도 그것은 집단이 발휘하는 공허한 힘 뒤에 감춰진 개인의 불안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냉소적인 시선이 때문일 것이다. 이후 그의 작업은 특정한 집단이나 인물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풍경 자체를 전면에 드러내거나 인물을 풍경의 일부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배회, 배회자로 명명되는 작업들이 이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적 색채와 절제된 표현,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한 표면 등 곽상원 특유의 음울한 풍경이 완성된다.
#불, 물, 숲
곽상원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물이나 불, 숲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환경에 서서히 침잠되어 간다. 마땅히 거부하지도 완전히 동화되지도 않은 상태로 얼굴이 없는 신체는 화면을 부유한다.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은 물체가 아닌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보고 그 물질을 물, 불, 공기, 흙의 4가지 원소로 분류하였다. 이 4가지 원소는 죽음, 소멸, 생성, 생명과 같은 포괄적인 의미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는데 예를 들어 불은 소멸과 죽음의 이미지에 가깝지만 불꽃이 수직으로 타오르는 모습은 하늘을 향한 비상, 생명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시학과 단편들』) 불의 상승하는 이미지는 곽상원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인데, 그는 이전 작업 <불이 되어버린 사람>, <영원히 타오르는 재>에서 집단이나 사회의 외압을 불의 이미지로 시각화했다. 또한 주변에 동화되지 않고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의 모습은 하늘로 상승하는 불의 특성과 우연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물은 불보다 여성적인 물질이면서 ‘물은 항상 흐르며, 물은 항상 떨어지며, 그리고 항상 수평적인 죽음으로 끝난다.’(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불과 마찬가지로 물과 숲의 이미지는 인간의 욕구나 의지를 억압하거나 붙잡아두려는 반대적 힘의 작용으로 읽힌다. 불과 숲이 수직으로 뻗은 상승하는 힘이라면, 물은 수평으로 흐르는 정적인 힘이다. 인물들은 숨 막히도록 빽빽하게 메워진 숲 안에서 혹은 주변을 맴도는 물 안에 갇혀 그 존재의 의무를 증명해내려 끊임없이 애쓴다.
바위 틈 사이에 겨우 피어난 풀 같이 존재의 미약함을 나타낸 이전 작업과 달리 근작에서는 인물의 밀도와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주목할 만 한 점은 두 명의 인물이나 사물이 한 화면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고독이나 불안에 갇혀있던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 관계를 통해 문제를 인식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익명화된 신체는 자신과 구분되는 타자이거나 하나의 자아에서 분열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는데 양쪽의 관점 모두 갈등의 대상이 외부로 향해있던 이전 작업과 달리 자신 내부에서 답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다. <이동하며 깨져 나가는 동물 조각>, <무던한 새>의 몸을 덮고 있는 얇은 시멘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깨지고 부서져 전시장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된다. 작가의 의도대로라면 이 조각들은 전시가 끝날 무렵에는 완전히 파편화되어 본래의 형체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견고하고 단단한 것으로 몸을 무장하고 지켜낼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일까. 어쩌면 겹겹이 쌓인 감정의 찌꺼기들도 일순간에 흩어지고 사라져버릴 무수한 삶의 파편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불안의 내용
황석권 / 월간미술 수석기자
누구나 자신의 삶이 안정적이길 바란다. 말 못하는 어린아이부터 당장 오늘내일하는 고령의 어른 할 것 없이 말이다. 그런데 스트레스 없이 긴장하지 않은 심적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이는 있어도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이는 없다. 그래서 불안은 매우 일상적이다. 본인의 의지로서 불안을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숙명처럼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많은 관계와 업무로 짜여 있기에 불안은 지속적인 형태의 것이 아니라 간간이 엄습해 온다.
곽상원의 작업의 근간은 불안이다. 그리고 그가 느끼는 불안감은 고립이라는 상황으로 풀어서 제시된다. 그는 불안을 느끼는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기보다 캔버스를 지배하는 음울한 분위기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우선 그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이룩된다. 그런데 그가 기억의 저장소에 꺼낸 그 풍경은 상황은 매우 일상적이며 익숙한 것인데 분명히 현실과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곽상원은 일상에서 익숙한 풍경에서 낯선 불안감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하게 한다. 그 양립할 수 없는 공존이 가능한 이유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곽상원이 그려내는 대상은 치밀한 관찰의 결과로 이뤄진 것이 아닌 망막의 신경에 스쳐 지나간 대상처럼 보인다. 특정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정도의 흐릿한 기억을 확인한다. 따라서 곽상원의 작업은 ‘배회’라는 행위를 증거하고 있다. 작가가 현장을 찾았다는 사실은 확인되지만 무슨 이유로 그곳을 찾았는지 어떤 ‘목적’은 배제된다. 따라서 곽상원의 캔버스는 ‘황량함’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어떤 것도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 사랑, 감정, 지위, 사람과의 관계도 어쩌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작가의 말) 곽상원의 행위 중 캔버스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 유일한 목적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대상화하는 것에서 작가는 불안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려 한다.
곽상원의 캔버스를 보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 얼마 전 타계한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먼(Zygmunt Bauman)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바우먼은 『유동하는 공포 Liquid Fear』를 통해 자신의 삶의 재단자인 인간 스스로가 느끼는 불안에 대하여 “유동한다(liquid)”로 표현했다. 신에게서 빼앗은 삶의 주도권은 시대가 변하면서 오히려 불안이 극대화되는 유동성을 띄게 됐다는 바, 우리의 삶은 확고함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닌 불안함으로 채워진다는 말이다. 매일 치열함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지만 오히려 앞을 알 수 없는 불안은 더 극대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곽상원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배회’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말이다. “퇴색해버린 하나의 순간과 앙금의 기억으로 남은 화면 속의 색과 장면들의 파편들처럼 표현했다.”
머물 곳을 잃어버린 이들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다양한 기억을 축적한다. 그러면서 체념을 배운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는 관계의 허무함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내용은 매우 일반적인 것으로 자신이 하는 일, 사랑, 사회적 지위 등을 지시한다. 대부분 우리의 번뇌는 이것들을 어떻게 지속하느냐로부터 생성된다. 지금의 상태와 관계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우리는 그것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불안은 영속하려는 가치가 주는 효용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의 부재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일상에서 끊임없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게 되어 허무함은 더 증대된다.
곽상원의 불안의 내용은 특정한 세대에 국한하지 않는다. 자연인으로서 그의 세대가 느끼는 불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문득 특별한 계기가 바탕이 되지 않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불안이 감지된다. 작가는 이에 대해 “나이를 초월한 내면의 고민과 불안은 누구에게나 그 형태는 다르지만 존재한다. 그 심리적 층위가 바로 내 작업이다.”라고 답한다. 그래서 곽상원 작업의 내용을 내면의 어두운 감정들과 욕망에 관한 다양한 서사로,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인 구성은 파편적인 내러티브로 짜여 있다고 본다.
좀처럼 떨치기 힘든 이러한 심리상태는 작가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운명처럼 품는 고민이기에 존재라는 거창한 말로 포장된 바로 우리의 고립감으로 드러난다. 이런 상태는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를 갖는데 그래서 곽상원은 이를 선과 안료를 이용하여 “쌓아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내용은 보이는 것들에 대한 주밍(zooming)으로 원경과 극단의 근경, 혹은 어떤 대상인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부분을 과대하게 확대한 것들이다. 이러한 시점의 변화도 하루하루 변화를 겪는 심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전시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독립적인 하나의 캔버스가 전시장의 상황과 결부되면서 관객의 등장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벽면의 패턴, 조명의 조도, 관객의 동선 심지어 전시장 공기의 흐름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배회’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불안은 그것을 상쇄할 어떤 심적 대응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의 성공 여부에 목적하기보다 본능적으로 불안은 떨쳐야 하는 것, 삶에 부정적인 것 등으로 인식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어쩌랴. 불안은 불치의 병처럼 안고 가야 하는 것, 친구처럼 지내야 하는 것인데. 상쇄보다는 존재를 인정하는 편이 더 현명한 대응일지도 모르겠다. 곽상원은 바로 그런 선택을 한 모양이다.
억압, 공동체, 익명, 그리고 이미지 - 곽상원의 회화에 대한 글
이성휘 / 하이트문화재단 큐레이터
곽상원의 2014년 작 <표류된 조우>로 시작해보자. 이 그림은 청회색 구름이 덮인 하늘 바로 아래로 세 개의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는 어둑한 산비탈이 원경으로 보이고, 그 앞에 펼쳐진 벌판에는 가건물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으며, 마치 온갖 서식물들이 뒤엉켜 있는 듯한 습지가 전경에 펼쳐져 있는 그림이다. 그림이 묘사한 풍경은 음산한 분위기를 빼곤 아주 낯선 풍경은 아니다. 다만 하나씩 뜯어볼수록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된다. 화면을 덮은 창백한 푸른색은 경관을 생기라곤 하나 없는 곳으로 만들고, 적막한 가운데 어떤 음모나 범죄가 가능한 곳을 상상케 한다. 특히 전경의 습지를 묘사함에 있어서 작가는 뒤엉킨 붓질 위로 마치 물이 흘러내리듯 물감이 줄줄 흘러내리게 했다. 이 묘사가 이 그림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데, 화면 상단의 산비탈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그 자체가 묘사된 이미지로 볼 수 있으나, 화면 하단에 와서는 이미지에 불과했던 물줄기가 캔버스 위로 줄줄 흘러내림으로써 물리적 물줄기로 전환되었다. 물감의 흘러내림은 중경의 수풀이 아니라 정확히 전경의 습지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물과 물감을 동일시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여기에 그림의 음산한 분위기가 더해져 물감은 어떤 범죄 현장의 혈흔과 같은 더 잔혹한 흔적까지 연상시킨다. 그리하여 작품을 대면하는 관람자는 이미지만이 아니라 물리적 흔적으로써 작품과 조우하는 셈인데,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비릿하고 불편한 감정을 어쩌지 못하게 된다.
곽상원의 회화는 개인과 공동체 간의 억압의 문제,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익명의 존재로 있을 때 개인의 이중성에 대한 문제를 다뤄왔다. 집단 구성원으로서 개인은 공동체의 목적에 부합하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속박당하고, 공동체는 이를 당연시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 군대, 직장 등 우리 사회의 여러 집단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이러한 개인과 공동체 간의 억압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대한민국 내의 여러 집단에 속하면서 살아온 작가 자신도 이러한 문제들을 겪었을 터, 어쩌면 <표류된 조우>는 작가가 군대 시절에 경험한 사건의 한 광경일 수도 있다. 그러나 회화를 반드시 구체적인 사건의 서사로 국한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이 그림은 좀 더 모호한 암시로 남는다.
최근 곽상원은 '누아르(noir)'라는 키워드로 일련의 작업을 전개해 왔다. 작가는 누아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음산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자신의 회화로 끌어들이는데, 그에 의하면, 누아르 영화가 다루는 비정한 범죄나 폭력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의 일면인 만큼 이미지로서도 도처에 만연해 있다. 그는 폭력성이 잠재된 이미지를 자신의 회화의 소재로 다룸으로써 오늘날의 리얼리즘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SNS상에서 무방비로 흩어져 있는 범죄나 폭력의 뉘앙스를 띈 이미지들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이러한 이미지들은 익명에 가까운 개인들이 업로드하여 공유된 것들이다. 작가는 익명의 개인들이 SNS상에 공유하는 이미지들 중에는 폭력과 범죄, 성적 코드가 센 이미지들이 많은데, 이 이미지들이 수많은 개인들에 의해 다시 리트윗됨으로써 이미지들이 지닌 폭력성이나 성적 코드가 증폭된다고 본다. 여기서 작가는 익명의 개인이 인터넷상에서 취하는 이중성을 목격한다. 그는 개인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피할 수 없는 공동체 생활, 그리고 이 속에서 느끼게 되는 좌절, 압박, 소외, 그 아이러니한 고독 가운데서 꿈꾸게 되는 일탈의 일부가 인터넷에 업로드된 폭력적인 이미지에 반영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이 이중성을 띄고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 오늘날의 리얼리즘이라고 한다. 거의 흑백으로 그린 그의 '누아르' 시리즈는 참조한 사진들의 프레이밍이나 각도, 조명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손, 발, 허벅지 등 신체의 일부를 클로즈업하여 전체 상황에 대한 궁금함을 자아내는데, 화면에 담긴 신체의 일부나 포즈가 구체적인 정보, 폭력적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암시의 측면이 더 강하다. 회화에 구체적인 서사를 담지 않고 모호한 상태로, 상상의 여지를 두는 것은 그가 전부터 취해 온 방식이다. 이것이 익명의 개인들이 이미지를 리트윗하여 폭력성이나 성적 코드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만약 곽상원의 회화가 사회 현상을 그대로 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리고 이를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그림은 또 다른 리트윗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터넷에 만연되어 있는 무수한 사진들이 우리를 폭력적이고 성적인 이미지에 무뎌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면, 그의 회화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불온함을 화면 밖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던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이미 그는 <표류된 조우>에서 이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회화가 이미지이자 물질인 이유. 그리하여 관람자는 온몸으로 그 물질이 던지는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펙터클의 균열을 확대하는 표류자의 시선 - 곽상원의 회화에 대한 글
이선영 비평가
● 곽상원은 존재와 그것이 놓이는 맥락 간의 모순을 표현한다. 작품들은 낯선 곳에 던져진 실존적 존재/상황에 대한 비유들을 담고 있다. ● 추상적인 큰 공간에 놓인 작은 생명이라는 설정은, 동양화나 낭만주의 풍경화만큼이나 현대 도시와 그 속에 거주하는 인간이라는 비유로 다가온다. 정처 없이 배회하는 인간의 시선이 머무는 장소는 자연 그자체도 본격적인 도심도 아니다. 말하자면 곧 중심이 되어 번영을 구가할 것이라 기대되는 주변부이다. 중심을 불완전하게 복제하는 주변은 중심을 바라보며 무한정한 대기나 유예의 상태에 있다. 그곳의 집들은 정주도 유목도 아닌 어정쩡한 유보의 상태이며, 사람들은 그곳에 완전히 뿌리내지 않는다. 잠시 머무르거나 스쳐지나갈 뿐이다. 성장이라는 목표는 이러한 과도기적인 시공간 또한 양산해 냈다. 이러한 장소들은 작가만이 발견할 수 있는 특별히 예외적인 장소가 아니라 도처에 있다. 명확한 시공간을 지우는 그의 방식은 이러한 보편성의 확보에 도움을 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토포스(Topos)로서의 특징이 있다.
배회라는 방식은 작품제작에도 적용되어, 그의 작품은 정확한 스케치가 없이 계속 바뀐다. 그러나 붓터치나 분위기는 일정하여, 여러 뜬금없는 장소들과 사물들과 상황들이 나름의 연결망을 이룬다. 그것은 특정한 현실이라기보다는 기억이나 상상, 어떤 정조에 의해 감축, 강화된 장면이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친숙한 곽상원의 풍경은 그가 작품 소재를 멀리서 찾지 않는 다는 점과 관련된다. 그의 작업실이 있는 신도시에서 풍경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구도심과 달리, 널찍널찍하게 뚫려있는 길은 인도라기보다는 자동차 도로이며, 머물기 보다는 통과하기 위한 장소이고, 접촉하고 대화하기 보다는 투명 인간처럼 서로를 스쳐 지나며, 서로가 아닌 각자 다른 무엇과 소통하는 그런 장소 말이다.
신도시에 전형적인 그러한 장소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 곳곳에 정체된 곳을 담겨두어 황량함에 황폐함까지 가세하곤 한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도시와 달리, 철저하게 현대의 생산/소비 시스템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조화된 그런 새로운 종류의 도시에서, 자발적 타발적으로 어디에도 속하기 힘든 자의 시선은 쓸쓸할 수밖에 없다. 그 체계가 강압적으로 또는 유혹적으로 재현하는 거대한 주기 속에 합류하지 않으면 그는 투명 인간이나 유령이 되는데, 이는 '자유직업'군에 속하는 현대의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시선이다.
그의 작품은 극단적인 분리와 구획화 안팎에 있는 풍경에 내재한 위태로운 신호를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임시 가옥들은 코드화의 극단에 코드의 붕괴가 임박함을 알려준다. 구조 자체에 해체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리드 구조와 대조되는 덩굴의 방식은 초월적 중심이 아니라, 다양한 중심들의 교차를 알려준다. 획일적 도시계획에 대한 대안적인 비전처럼, 작가는 집중적인 계획보다는 자생적인 그물망을 강조하면서 차이 짓기를 가속화한다. 그는 체계 바깥의 것들을 주시한다. 체계가 내면화하지 못했던 망각된 존재들, 즉 지배적인 규칙에 포섭될 수 없었던 타자들의 존재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에게 바깥과 타자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인간으로부터 소원한 세계라는 상황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것은 생산자가 생산수단이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것에서 비롯된다. 소외를 극복하는 방식은 각자의 정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 곽상원의 방식은 상황주의자들의 그것과 가깝다. 피터 마샬이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에서 지적하듯이, 상황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화석화된 삶을 대신해서 행위들과 우연한 만남의 흐름인 표류와 사건들과 이미지들을 재배치하는 전용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표류의 전략은 혁명보다는 '풍요의 사회'에 더 적절한 대응방식으로 보인다. 표류의 전략은 사회에 대한 거대한 정치적 목표보다는, 일상 속에서의 변형과 창조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은 일사 분란한 의견과 행동의 통일이라는 전략을 추구하는 방식보다는 이러한 무정부주의적 방식과 더 어울린다. 우리가 사는 곳을 바라보는 곽상원의 낯선 시각은 '스펙터클의 사회'(기 드보르)를 비판하면서, 상품으로 매개되지 않는 현실을 추구하는 방식과 조응한다. 그의 시선은 '기존질서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행하는 자신에 관한 담론인 스펙터클'(기 드보르)에 균열을 내고, 그 균열 안에서 번성할 대화를 청하기 때문이다. ■